studio@subdivision.kr ︎             +82 (2) ⑦ ② ② (0) ⑨ ⑨ ⑤                         ︎ IS A SEOUL-BASED LANDSCAPE ARCHITECTURE OFFICE             INSTARGRAM ︎                        
1.
계절의 정원은 시간의 색을 빛으로 드러내며 지구가 상상한 스펙트럼의 순간을 짧은 미래에 투사한다. 정원은 물들고 자연의 형상은 불규칙의 정합을 넘어 가볍게 흔들리며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멈추어 가면 앞으로는 별빛도 비추고 비가 오면 다시 물들겠지. 달이 차면 토끼의 그림자는 아름다움을 빚고 해가 뜨면 다른 색의 어제가 반복된다. 나비는 다시 날아들고 벌은 날개의 그림자를 감추고 오늘은 다른 꽃이 피고 내일은 같은 꽃이 지면 이제 장마가 시작되겠지.

2.
개인의 정원은 소그룹 커뮤니케이션과 집합적 의사 결정의 과정으로 발전한다. 다른 취향과 낯선 감각으로 게임을 진행하기 때문에 관계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원만한 의사 결정의 성패를 좌우한다. 데쟈뷰가 교차하고 낯의 상상이 구현되며 디자이너의 욕망은 새로운 긴장을 만들지만, 무색의 언어가 빛의 공간으로 조형되는 과정은 참가자 모두를 옅은 감정에 들뜨게 한다. 정원은 계절을 대지 위에 드러낸다. 시간의 감각은 허무를 깊게 하기도 하지만 세계를 마주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3.
현대 조경은 자연의 정체성을 새로운 환상으로 변환하는 상상의 과정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취하며 끈임없이 새것을 바라고 지루하지 않음에서 내일의 에너지를 갈구한다. 디자이너는 자연의 순환을 관찰하며 공간을 사유하고 새로운 태도를 발견하여 사회의 보편적 합의를 넘어야 한다. Signature Landscape는 겸허한 태도로 상상을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이며, 자연을 모티브로 새로운 경관을 제공하기 위한 창의적 생각이다. 원생의 경관은 정제된 이미지로 재현되고 대안적 자연은 플랫폼 위에 연출된다. 감각은 다시 환상으로 소비되고 충동으로 순환하며 휘발성 기억으로 사라질 것이다.

4.
오래된 쓰레기 매립장을 도시공원으로 복원했다. 산업 시대는 인간의 욕심과 재생에 대한 무지, 자본을 향한 악마의 역사다. 숲으로서의 공원과 정원으로서의 생태가 의미적 규모의 재생을 발현할 가치는 미약하지만, 공공성을 위한 태도와 뉘우침의 표현이라면 창조적 운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소멸하지만, 자연은 순환하며 도시는 역사를 되풀이한다. 상생을 위한 재생인지, 자생을 위한 상생인지, 고립을 위한 새로운 간섭인지 가치는 긍정을 되풀이하지만 반성을 위한 새로운 순환이 허전한 매개가 되겠지.

5.
도시는 사실 추상화된 개념이지만 학술 용어로 즐겨 소비되는 탄산음료 같은 상투적 단어다. 사람들은 미래를 얘기하지만 순간을 소비하며, 사랑을 고백하며 욕망을 감추는 존재다. 2023년 지구 위기에 대한 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는 그 이상의 실감을 의심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도시는 회복력을 잃어간다. 건축가는 비판적 책무를 잊은 지 오래다. 집합 지성이 열정을 가지고 구체성을 논의하기 위한 파빌리온을 구축할지 문화적 유희를 즐기기 위한 성찬이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수면 상승보다 중요한 게 우아한 사유의 즐거움일지도 모르지.

6.
서울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지역성을 상실했다.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도시의 성장은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유행에 수동적인 사람들을 길들였고 서울의 물질은 가치를 대변한다. 차가운 재생을 반복하는 지방의 도시는 소멸의 위기에서 경쟁하며 지역성을 재고하는데, 너무 많은 회의가 모두를 지치게 하기 때문일까 젊음은 등을 돌리고 마지막 로컬을 외면한다. 성공적인 도시재생의 실체는 없다지만 역사를 간과하며 서울과 경쟁할 순 없을 텐데. 지역을 떠날 수는 있겠지만 풍요는 개성을 죽이고 상대적 박탈감은 정서적 결핍을 대신한다.

7.
이데올로기 이후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지고 자기결정권에 당황하며 그래서 가치관이 소멸하는데 개인과 타인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미적분 보다 어려워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소셜에 관한 사회적 관습은 농경 문화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출발이고, 자본주의의 노동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며, 정치적 블라인드로 여론을 단순화하기 위한 조작이다. 아름다운 정원에 모두를 위한 공간이 필요할까. 관계가 아름답다는 설정은 학습화 된 종교적 의무가 아닐까. 파블로비치는 광대를 자처하며 그를 에워싸는 귀족들을 비웃는데 관습이 무너지던 시기에는 어김없이 반복되던 질투의 형상이다.